ܹ Ѽӱȸ


θ޴


޴

ȸ, ȸ߰ڷ ٷΰ

  • ȸȳ
  • ȸ߰ڷ

ڷ

Ȩ > ǽ > ڷ


글보기, 각항목은 제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수, 첨부파일, 내용으로 구분됨
<한글> 4.훈민정음에서 한글까지
작성자 창고지기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5221
<훈민정음에서 한글까지>

◈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 세종 대왕은 백성들이 글자를 몰라 생활에 많은 불편을 안고 살아가고 있음을 안타까이 여겨 집현전 학자들의 도움을 받아 '훈민정음'을 창제하였으니, 그때가 1443년 세종 25년 음력 12월이었다.

◈ 한글 최초의 문학 작품 훈민정음 반포에 앞서 1445년 한글로 된 최초의 문학 작품인 <용비어천가>가 완성되었다.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과 조선 건국의 과정을 그린 125장의 악장체 영웅 서사시이다.

◈ 훈민정음 반포 세종 대왕은 훈민정음을 만들고 나서 세 해 동안 계속해서 한글 다듬기와 문서와 작품을 쓰는 실용 시험을 거쳐 드디어 1446년 9월 상순에 훈민정음을 반포하였다. 훈민정음 본문은 세종 대왕이 지었고, 해설 부분은 정인지를 비롯한 집현전 학자들이 지었다.

◈ 세종 시대의 한글 보급 세종은 과거 시험에 한글 쓰기를 필수과목으로 넣었으며, 신하들에게는 문서를 한글로 짓게도 하였다. 또한 한글의 보급을 위해서 '효뎨례의(孝悌禮義)'라고 새긴 한글 동전을 만들기도 했다.

◈ 한글 이름의 변천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의 '훈민정음'에서 시작된 한글의 이름은 그것을 줄인 '정음(正音)', 훈민정음과 같은 시대에 쓰였던 '언문(諺文)', 최세진이 중국 음운학에 빗대어 쓴 '반절(反切)', 부녀자들이나 쓰는 글이라는 뜻의 '암클'로 이어지다가 1913년에야 비로소 '하나의 글' '큰 글'이라는 뜻의 '한글'로 정착되었다.

◈ 한글 박해 1504년 (연산군 10년), 연산군의 잘못을 지적하는 한글 벽서 사건이 나자, 연산군은 모든 백성에게 한글 쓰기를 금하고, 한글로 된 책들을 불사르게 하는 등 한글을 박해했다.

◈ 한글 문학의 꽃핌 16세기에 들어오면서부터 다양한 시가와 가사가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특히 정철의 <관동별곡>을 비롯한 가사들은 일찍부터 좌해진문장(左海眞文章)이라는 극찬을 들을 만큼 국문학의 진수를 드러냈다. 또한 윤선도의 시가 문학은 순수한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활용하여 본격적인 문학어로서의 한글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초기 한글 소설은 한문을 번역하는 역어체로 문학어로서 미흡한 단계를 면치 못하고 있었다. 본격적인 한글 소설은 광해군 때 허균이 지은 홍길동전에서부터 어느 정도 자리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그 후로 김만중의 <구운몽>과 작자미상의 <춘향전>, <심청전>같은 작품이 속속 나타났다.

◈ 한글이 나라글로 자리잡음 1894년, (고종 31년) 당시 대한제국 칙령 제1호로 "법률 명령은 다 국문으로 본을 삼고 한문 번역을 붙이며, 혹 국한문을 혼용한다."는 한글 전용 대원칙에 관한 법령이 공포된 뒤부터 한글이 명실공히 우리 나라의 국문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 유길준의 <서유견문> 갑오경장이 있던 1894년, 미국유학에서 돌아온 유길준은 이듬해 국한문을 혼용하여 <서유견문>을 펴냈다. 국한문을 섞어 썼다 하여 당시 지식인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았으나, 그는 조금도 굽힘없이, 한문만으로는 자기 생각을 다 나타내기 어려울뿐더러 국민에게 쉽고 친근한 말로 새로운 지식을 알려야 한다는 소신을 피력했다.

◈ 순한글 신문의 탄생 1896년 4월 7일, 민간단체인 독립협회에 의해서 순한글로만 쓰는 <독립신문>이 발간되었다. 최초의 민간신문인 독립신문은 순한글쓰기와 띄어쓰기를 시행하여 한글맞춤법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으며, 국민들의 한글 사용에 큰 영향을 끼쳤다. 이러한 독립신문의 창간일이 오늘날 '신문의 날'이 되었다.

◈ 한글의 중간 시조 '한글'이란 이름은 주시경(1876-1914)선생이 만드신 것으로 '언문, 암클, 반절'이란 이름으로 천대받던 훈민정음의 권위를 되찾게 하였다. 또한 선생은 분석적인 방법으로 현대적인 국어학을 개척하고 <조선어학회>의 전신인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여 국어 운동의 기초를 닦아, 한글을 새롭게 부흥시킨 한글의 중간 시조이다.

◈ 한글학회의 성립 주시경 선생 아래 모였던 <국어연구학회>는 총독부의 심한 감시를 피해 있다가 1921년 <조선어 연구회>로 다시 모였고, 1931년 <조선어학회>로 명칭을 바꾸어 활동하다 일제말기 극심한 탄압을 받기도 했다. 광복 후인 1949년 비로소 <한글학회>로 다시 서게 되었다

◈ 한글날 제정 1926년, 조선어 연구회에서는 음력 9월 29일을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28일을 훈민정음 반포 기념일로 정하고 그 이름을 '가갸날'이라 명했다. 그러나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원본에 음력 9월 상순으로 되어있음을 알고 이를 양력으로 환산해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정하였다.

◈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3년, 한글 반포 487돌을 기념해 한글학회에서는 그 동안의 연구 성과인 <한글 맞춤법 통일안>을 공표했다. 이로써 한글창제 이후 근 오백년 동안 제대로 된 언어규범이 없어 혼란스럽던 한글체제를 잡아줌으로써, 합리적인 언어 생활의 기틀을 다지게 되었다.

◈ 일제 시대의 국어 운동 방해와 박해가 심했던 일제시대에도 국어운동은 활발히 이어졌다. 한글학회는 1933년 <한글 맞춤법 통일안>, 1936년 <표준어 사정>, 1940년 <외래어 표기법> 제정, 1942년 <조선말 큰사전> 출판에 착수했다. 1932년 조선어학회 기관지인 <한글>이 창간되고 1934년에 조선어학연구회 기관지인 <정음>창간, 1931년-1934년 민간신문의 브나로드 운동과 강습회 등은 일제치하의 대표적인 국어운동이었다.

◈ 일본의 민족어 말살 정책 일제 강점기 35년, 특히 그 후기 8년간은 우리 민족사에 전례가 없는 암흑기였다. 언어정책은 유일하게 일본어 강요뿐이었고 줄기차던 민간의 국어운동은 뿌리뽑혔기 때문이다. 일제의 민족어 말살 정책은 1894년 이후 12년간의 일본어 부식기, 1906년 이후 30년 간의 한·일어 병용기를 거쳐 1937년 일본어 전용기를 만들었다. 이 과정 중에 일제는 통계를 통해 1945년 10세 미만 아이들을 제외한 총인구의 일본어 해득률을 41%로 추정하고 있다.

◈ 조선어학회 사건 1938년 4월 일제의 파멸적 교육령이 시행되면서 일제는 각급 학교의 조선어과 폐지에 이어 조선어 금지, 일본어 상용을 강요했다. 특히 1942년에는 치안 유지법으로 조선어학회 회원과 그 관련자 29명을 구속하고 고문으로 사건을 날조했다. 이 과정에서 국어학자 한징, 이윤재가 옥사했으며, <조선말 큰사전> 간행은 물거품이 되었다.

◈ 항일 문학 구한말 의병장들의 항일 한시부터 맥을 이어온 저항문학은 일제치하에서도 줄기차게 이어졌다. 3·1운동 민족대표자 중 한 사람인 한용운의 <님의 침묵>, 신경향파 이상화의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심훈의 <그날이 오면>, 1940년을 고비로 우리말과 글이 금지된 상황에서 우리말로 시를 써 끝까지 저항한 이육사, 윤동주님의 항일 문학에 흐르고 있는 것은 뜨거운 민족애와 고결한 애국정신이었다.

◈ 광복 후의 한글 일제 말기 8년 동안 거의 사라질뻔한 한글은 1945년 광복 후에 겨우 숨통을 트고 다시 활발한 기지개를 켜기 시작했다. 석방된 조선어학회 회원들을 중심으로 그 동안 잃어버렸던 국어 회복 운동에 나섰는데, 우선 각종 국어 교과서를 지었으며, 1946년에는 왜말을 몰아내기 위한 학술용어 제정, 1948년에는 일제에 훼손되었던 '우리말 도로 찾기' 등을 행하였다.

◈ 우리말 도로 찾기 1948년 문교부에서 간행한 우리말 도로 찾기는 일제치하에서 뿌리내린 일본어 단어를 우리말로 바꾸기 위해 출간한 책으로 비록 36면에 불과한 소책자이지만 이 방면의 본격적인 첫 업적이라 할 만하다. 일본어를 앞에 보이고 거기에 해당하는 우리말을 보인 것으로 '上潮→밀물', '아나타→당신', '花見→꽃구경', '中鮮→중부지방', '스시→초밥', '혼다데→책꽂이', '벤또→도시락' 따위가 그 예이다.

◈ 광복 후 국어 교과서의 변천 1945년 11월, <한글 첫걸음>이 조선어학회 편찬으로 간행되고 이듬해 <초등국어 교본><중등국어 교본> 각 3권이 완간됐다. 정부가 수립된 1948년 10월 국교국어 1-1 <바둑이와 철수>가 나왔다. 이것은 음절과 자모 중심에서 벗어나 처음부터 문장을 교육하는 방법을 썼는데 한글의 특성과는 맞지 않는 것이었다. 이후 4차례 교육 과정을 개편했는데 1987년 6월 제5차 개정을 통해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로 교과서를 나누고 시간도 따로 정해 운영하기에 이른다.

◈ 한글의 대중성 한글은 훈민정음 발문에 쓰인 대로 닭 울음소리며, 개 짖는 소리까지 다 적을 수 있을 만큼 보편적인 음성기호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이처럼 뛰어난 표현력을 가지고 있는데다, 너무나 배우기 쉬워 한 때는 하루 아침에 배운다 해서 '아침 글'이라는 별칭으로 불리기도 했다. 오늘날 우리 나라가 세계에서 문맹률이 가장 낮은 나라가 된 것도 바로 이 한글의 대중성 때문이다.

@자료 출처 : 한글사랑
첨부
  •     

ּ ó, 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