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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사도세자와 인간교육
작성자 알짜돌이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1198
사도세자와 인간교육

〈정옥자·서울대교수〉

조선왕조의 21대왕 영조는 50년이 넘게 왕위에 있으면서 조선문화 전성기인 진경시대를 이룩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대목은 아들인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는 것이다. 인륜을 중요시하던 조선시대에 국가 최고통치자가 어떻게 자식을 그렇게 잔혹한 방법으로 죽였으며 그 죽음에 대해 동조하는 신하들까지 있었는가 하는 것이 우리를 당혹하게 한다.


이 사건은 정치사적으로 볼 때 노론과 소론의 갈등이 내재해 있다고 볼 수 있겠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세자교육에 대한 조선왕조의 높은 기대치에 있다. 조선왕조는 세습군주제의 한계를 깨기 위해 언관제도, 붕당정치 등 왕권과 신권이 균형을 이루려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지만 무엇보다도 왕위 계승자인 세자교육에 비중을 두었다. 왕의 경연에 버금가는 서연을 통해 세자교육에 힘썼다. 경연을 소홀히 하는 왕이 비판받고 심하면 반정의 대상이 되어 쫓겨났듯이 서연에 게으름을 피우는 왕세자는 혹독한 비판을 면치 못했다. 세자교육도 사대부나 똑같이 ‘소학’이나 ‘동몽선습’, ‘격몽요결’ 등으로 시작했으니 지식보다는 인간교육이 우선이었다. 그런데 영조는 궁중의 하녀라 할 최무수리 소생으로 이복형인 경종이 후사가 없어 뒤늦게 세제로 책봉되어 정치적으로 어려운 일을 겪으며 왕위에 올랐다. 붕당정치의 극성기에 신하들이 왕을 선택하는 상황 속에서 소론의 지지로 왕위에 오른 경종에 비해 노론의 지지로 왕위에 오름으로써 정쟁 속에서 고통당했다.


영조가 중첩된 정치적 난관을 극복해 조선왕조 최고의 문화전성기를 구축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위기관리능력과 무관하지 않다. 비록 노론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고 하나 어머니인 숙빈 최씨의 친정이 외가로서 그에게 힘이 되었을 리 만무하다. 더구나 적서(嫡庶)를 엄격하게 따지던 당시에 어머니의 출신배경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왕이면서 스승이라 하여 군사(君師)로 자부하던 그는 아들인 세자에게 더욱 기대를 걸고 자신보다 더 훌륭한 왕이 되도록 하기 위해 교육에 진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토록 기대했던 세자가 노·소론간의 정치적 갈등을 이겨내지 못하고 계속 비행을 저지르자 이를 교정하고자 극한적인 방법을 동원한 것이 뒤주에 가두는 것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애초에 죽이려고 그랬던 것은 물론 아니었다. 세상에 어느 아비가 자식을 죽이려 하겠는가. 그의 높은 기대치에 부응하지 못해 신하들의 쑥덕공론의 대상이 된 자식에 대한 분노와 교정차원에서 벌인 일이 갈 데까지 간 것이다. 이 사건에서 보듯이 우리의 전통시대에는 왕실에서부터 여염집에까지 글을 읽어야 하고 무식을 면해야 한다는 것이 보편적인 정서였다. 19세기가 되면 문맹률이 낮아지면서 지식이 하향 확산되는 것도 문치주의(文治主義)를 지향한 조선의 방향성에 기인했던 것이다.


이러한 전통은 오늘날 출세주의와 맞물리면서 교육열의 원천이 되었다. 다만 그 시대는 지식교육보다 인간교육이 우선이었음에 반해 지금은 인간교육은 생략한 채 지식 내지 기능교육만이 기승하여 교육의 본질마저 망각하고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또한 자식을 일류학교에 넣는 것이 엄마의 성취로 평가되고 사회적 성적표가 되다시피 해 아이와 엄마는 혼연일체가 되어 일류병을 앓게 되는 것이 문제다.


아이들을 입시전쟁에 몰아넣어 스스로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게끔 해 죽음에 몰아넣는, 또 다른 형태의 사도세자 사건들을 만들어 내고 있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교육에도 ‘과유불급(過猶不及)’은 명언이다. 조기교육에다 시험공부에만 매달리는 아이들이 창조적인 사람으로 자랄지 의문이다. 본연의 자질을 살리고, 천품을 왜곡시키지 말아야 창조적인 인재로 자랄 것임은 불문가지다.

@중앙일보 2001.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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