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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칭기즈칸 ! 그를 아시나요?
작성자 알짜돌이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1299
칭기즈칸의 생애

12세기, 중원 대륙은 여진족의 나라 금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 아래 쫓겨간 한족들의 나라 남송(南宋)이 있었다. 몽고는 12세기 중반 카불이 ‘칸’(왕)이 되어 몽고족을 통일했지만 금을 위시한 주위 여러 세력들의 견제로 20년도 못 되어 해체되고 말았다. 이후 몽고족들은 부족 내부의 잦은 분쟁에 휘말렸고, 생명과 재산이 보장될 수 있는 통일된 질서를 갈망하였다.

이 때 바이칼호 주변에서 몽고의 씨족연합체를 이끌던 왕족이자 용사 예스게이는 부인 호에른으로부터 얻은 장남에게 자신이 쓰러뜨린 적장의 이름을 붙여 테무친(칭기즈칸의 본명)이라 칭한다. 테무친이 아직 어린 시절, 테무친의 아버지가 타타르인에게 독살당하면서 테무친 일가는 곤경에 처한다. 연합했던 씨족들이 테무친의 가족을 버리고 떠났으므로 이때부터 테무친의 어머니는 어린 자식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강줄기를 따라 밤낮없이 과실을 채집하고, 테무친과 동생들도 사냥과 낚시로 양식을 구해 와서 생계를 도왔다. 황야에 버려둔 일가가 꿋꿋이 역경을 헤쳐나가며 장남인 테무친이 자라나는 모습을 본 옛 부족들은 이에 불안을 느끼고 테무친을 사로잡아간다.

테무친은 목에 칼을 쓴 포로의 몸이 되었지만 타고난 친화력과 기지를 이용하여 탈주에 성공한다. 역경을 이겨내면서 강인한 젊은이로 자라난 테무친은 부르테를 아내로 맞이하고 예전에 자기 아버지에게 은혜를 입은 바 있는 케레이트의 왕을 찾아가 그에게 의탁한다. 케레이트족 왕의 세력하에 보호받으며 그는 차츰 자기 세력을 키워나갔다. 그의 평판에 이끌려 용사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1189년경, 테무친은 몽고 제후들에 의해 칸으로 추대되어 ‘칭기즈칸’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칭기즈’는 ‘하늘이 내리신’이라는 뜻이라고도 하고, 샤머니즘의 빛의 정령 이름에서 땄다고도 하는데 ‘흔들리지 않는 군주’라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몽고족에게 떠받들 왕이 필요했다기보다는 공동으로 병력을 동원하는 전쟁을 지휘할 지도자가 필요했기 때문에 몽고 제후들은 칭기즈칸을 옹립했으나 칭기즈칸은 절대적인 지도력을 발휘하여 군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간다. 1203년 경쟁자이자 숙적인 자무카를 격파하고 이후 여러 부족을 복속시키면서 케레이트 왕의 세력을 압도하여 굴복시킨다.

몽고 일대의 평정이 끝난 1206년, 오논 강 하원에서 거대한 쿠릴타이(대집회)가 열리고 이 자리에서 칭기즈칸은 명실상부한 몽고제국의 군주가 된다. 씨족 공동체는 해체되었고 칭기즈칸이 만든 군사조직에 따라 몽고인들은 95개의 천호(千戶)로 이루어진 거대한 군사조직의 일부가 되어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게 되었다. 부족시대의 약탈과 혈투를 막기 위해 칭기즈칸은 ‘야사’라고 불리는 엄정한 법률을 시행하였다. 몽고의 유목민들에게 새로운 질서가 부여된 것이다.

이듬해 키르기즈족, 오이라트족을 복속시키고 1209년 위구르를 정복한다. 1210에는 탕구트의 항복을 받아내고 1215년에는 선대로부터의 원수 금나라에 침입하여 베이징을 함락시킨다.

칭기즈칸이 처음부터 서방 정벌을 계획한 것은 아니었다. 당시 서아시아의 호라즘 왕국은 이슬람 세계의 패자 술탄이 지배하고 있었는데 1218년, 칭기즈칸은 그에게 우호적인 태도로 사신을 보내 교역하고자 하는 뜻을 전했다. 호라즘 측은 이를 무시하고 사신을 살해해 버렸다. 이에 칭기즈칸은 몽고족의 관습대로 ‘복수’ 차원에서 호라즘을 공격하게 된다. 칭기즈칸의 7년에 걸친 중앙아시아 대원정으로 사마르칸드, 부하라 여러 도시가 함락되고 술탄은 도망 끝에 카스피해 동남쪽 섬으로 내몰려 죽었다. 몽고군 별동대는 크림 반도까지 진출, 러시아의 제후 연합국을 격파했고 칭기즈칸은 술탄의 황태자 잘랄 웃딘을 인더스 강변에서 추격한 후 철군하였다.

1227년 8월, 칭기즈칸은 반란을 일으킨 탕구트족을 정벌하다가 얻은 병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는 정복한 땅을 만년에 아우들과 아들들에게 분배해 주었고, 칭기즈칸 사후에도 그 아들들과 손자들의 활약으로 몽고는 금과 남송을 멸망시키고 중원대륙을 정복하였고 원나라와 4한국(汗國)을 세워 동쪽의 우리 나라(당시 고려) 동해에서부터 서쪽의 지중해 근처까지 영향력을 행사한다.


정복자 칭기즈칸의 면모와 그의 영향

칭기즈칸의 일화 속에는 그의 인간적인 친화력이 잘 나타나 있다. 그의 장인이 그를 처음 보았을 때, “눈에는 불이, 얼굴에는 빛이 있다”고 평한 것은 그의 육체와 정신 양면의 건강을 의미한다고 보겠다. 그와 처음 만난 많은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그를 도왔고 그의 부하가 되었다.

친화력뿐 아니라 제왕다운 도량이 부하들의 진정 어린 충성을 이끌어냈다. 그는 자기에게 은혜 베푼 자들을 결코 잊지 않았고, 정복의 공로를 부하들과 병사들에게 돌렸으며 그들을 자기 혈육처럼 아꼈다. 아무나 쉽게 믿지는 않았으나 충성을 확인한 부하에게는 끝까지 믿음을 지켰고 부하들은 이런 그에게 신명을 다해 보답했다.

정복자로서의 칭기즈칸은 그에게 반기를 든 적에 대해서는 철저히 피로써 응징했다. 유목민족인 몽고족에게 복수는 일종의 도덕적인 의무로서 다른 무엇보다 우선이었다. 그 자신에게나 그의 가문에게 가해진 모욕은 물론, 몽고 민족에 대한 모욕적인 언사에도 가차없이 응징했다.

칭기즈칸은 자신이 하늘의 뜻에 따라 정당한 행동을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하늘이 해가 뜨는 곳에서 해가 지는 곳까지 지구상의 모든 것을 자신에게 부여했다는 신념이 있었으므로 그를 대적하는 세력은 하늘의 뜻을 거스르는 셈이었다. 이런 까닭에 그는 자기에게 귀순하는 피정복민에게는 너그럽게 대하였고 그들의 마을에는 피해를 전혀 끼치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대적하는 이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살육당했고 그 성읍은 몽고 기마병이 휩쓸고 지나간 후 ‘먼지 하나 남지 않을 정도로’ 파괴되었다. 칭기즈칸의 소문을 들은 유럽인들은 그를 ‘신의 채찍’으로 간주하고 두려움에 떨었다.

실제 칭기즈칸은 포용력을 넉넉히 갖춘 인물이었다. 그 자신은 샤머니즘의 신봉자였으나 불로 장생을 갈망하여 도교의 설법을 듣기도 했으며 타종교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고, 자손들에게도 특정 종교를 백성들에게 강요하지 말도록 당부했다. 요나라의 유신 야율초재 등 학식을 갖춘 유능한 신하들을 중용하여 그들의 학식과 교양의 도움으로 통치 기반을 구축했으며, 유목문화에 젖어 있던 그였지만 자신이 이해하기 어려운 외래문화도 수용하기 위해 노력했다. 문자의 중요성을 깨닫자 위구르 문자를 받아들여 국자(國字)로 삼기도 했다. 능력과 실적 위주의 인재 등용, 그의 탁월한 용병술과 외교술 또한 세계 정복의 주 요인으로 작용했음은 물론이다.

<동방견문록>으로 유명한 마르코 폴로는 유럽인들에게 칭기즈칸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는 대단한 강인함과 대단한 통찰력과 대단한 용맹의 소유자였다. 그가 군주로 선출되었을 때 얼마나 뛰어난 절제와 정의로써 다스렸는지, 그에 대한 사랑과 존경은 한 사람의 군주가 아니라 거의 신에 대한 것과 같을 정도였다.”

이러한 지도자의 자질을 갖춘 칭기즈칸은 ‘하늘의 뜻을 따라’ ‘해 뜨는 곳에서 해 지는 데까지’ 대제국을 이루었다. 그는 동쪽 만주에서 서쪽은 이란까지, 남쪽은 황하를 경계로 하는 광대한 지역을 정복했다. 그 넓이에 있어서는 알렉산더 대왕의 영토도 도저히 미칠 바가 아니었다. 유럽과 아시아는 그의 말발굽 아래 하나가 되었다. 실크로드를 장악한 몽고는 동·서양을 연결하여 전세계의 절반 이상을 다스렸고 몽고의 통치는 칭기즈칸 사후에도 200년 가까이 지속된다.

서양인들에게는 ‘칭기즈칸 콤플렉스’를, 동양인들에게는 은근한 자부심을 선사한 칭기즈칸, 그는 오늘날 사회에서도 유능한 지도자, 유능한 최고 경영자의 모범으로 재평가되어 여전히 인류 역사에 영향을 끼치고 있다.

@출처: 월간지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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