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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해적.. !@!
작성자 알짜돌이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1396
글이 넘 긴가???
뭐..읽기 싫으시면 안읽으셔도 되고...
그래도 상식의 폭을 좀 넓히고자 하시는 분은 끝~까지 읽어주시고....^^


바다의 무법자
해적(海賊)

경제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점진적으로 바다를 통한 물량의 이동이 급증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무역로로서의 바다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
역사적으로 해상 무역이 활발할 때 모습을 드러냈던 해적이 오늘날 다시 기승을 부리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해적이라 하면 무엇이 연상되는가? 검은 해골기, 조각난 보물지도, 동화 「보물섬」에 나오는 ‘실버’ 선장, 또는 동화 「피터팬」에 나오는 악랄한 ‘후크’ 선장, 최근 만들어진 해적 영화 <컷스로트 아일랜드>의 여자 해적 …. 동화나 소설, 영화에서는 대부분 해적 생활을 즐겁고 낭만과 모험이 가득한 모습으로 그리고 있다.

그러나 실제의 해적은 그와 다르다. 국제법상 해적은 “공해상에서 국가 또는 정치단체의 명령 내지 위임에 의하지 않고 사적(私的) 목적을 위해 선박에 대한 약탈과 폭행을 자행하여 해상 항해를 위험하게 하는 자”이다. 쉽게 말하자면 바다를 누비는 범법자이다. 육지와는 달리 망망대해에서 해적을 만나면 구원의 손길은 대부분 너무도 멀리 있어 삽십육계 줄행랑에 실패하면 그야말로 속수무책으로 약탈당하고 때로 생명까지도 잃게 된다.

최근 해적 피해 증가

2000년 2월 23일, 선장을 포함하여 한국인 선원 일곱 명이 승선한 파나마 국적 화물선 ‘글로벌 마스’호가 팜유 6000톤을 싣고 항해하다가 인도네시아 북방 약 300마일 해상에서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해적들에게 납치되었다. 이들은 다행히 해적들에게 배만 빼앗기고 풀려나 작은 어선을 타고 표류하다가 17일 만인 3월 10일에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1999년에도 일본 화물선 ‘아론드라 레인보우’호가 납치되었다가 인도 해안경비대에 나포되고 선원들은 구조된 적이 있다.

위의 두 경우는 그야말로 양호한 편이다. 1998년 9월 27일에 한국인 선원 두 명이 승선한 파나마 국적 화물선 ‘텐유’호는 인도네시아 쿠알라탄정항을 출발한 지 3일 만에 통신이 두절된 채로 실종되었다. 알루미늄괴 3006톤를 싣고 인천항을 향했던 이 배는 1998년 12월 31일, 중국의 장지야항에 ‘산에이-1’호라는 전혀 다른 이름으로 나타났다가 중국 당국에 적발되었다. 조사 결과, 텐유호 사건에는 한국, 인도네시아, 싱가포르, 미얀마, 중국 등 5개국과 연관된 국제 범죄조직이 개입된 것으로 나타났다. 이 사건은 중국 공안부에서 조사중이지만 실종된 선원의 생사여부는 아직까지도 확인되지 않은 상황이다.

텐유호 사건은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 1990년 이후, 해적행위가 크게 증가하고 있다. 1991년 전세계에서 발생한 해적 피해는 107건으로 집계되었는데 이것이 1999년에 이르러서는 285건으로, 거의 세 배 가량 급증하였다.

총으로 무장한 해적들은 1990년대 후반부터 계속 증가 추세이며 물건만 약탈할 뿐 아니라 선박 자체를 포획하고 선원들을 모두 살해하는 등 점점 대형화, 흉포화되고 있다. 해적들이 주로 활개치는 곳은 말라카 해협, 남중국해, 동중국해 등으로 동남아 일대의 바다는 해적으로 악명이 높다. 인도네시아와 싱가포르 사이에 위치한 말라카 해협은 주위에 섬들이 많아 해적들이 은신하기가 용이한데다 해협이 좁고 통행하는 배가 많아서 국제 해적들의 주무대가 되고 있다. 경제난에 처한 인도네시아, 중국, 미얀마 등의 선원들이 해적으로 쉽게 돌변하고 있는데 해당 국가들은 치안력의 부족으로 해적 소탕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실정이다.

해상무역과 더불어 출몰한 해적

<서양>

해적은 언제부터 있었을까? 인류가 바닷길을 교통로로 이용하기 시작할 때 해적도 역사 속에 등장한다. 호메로스의 「오딧세이아」에는 해적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 등장하는데, 서양에서는 고대부터 이집트, 페니키아를 중심으로 해상무역이 발달한 에게해 연안, 동지중해 방면에 해적이 자주 출몰했다. 해적에게 사로잡힌 사람은 짐과 재물을 약탈당하고 노예로 팔리기 마련이었다.

그리스의 도시국가 아테네가 해상권을 장악했을 때, 그리고 로마의 경쟁국이자 해상국이었던 카르타고가 해상권을 장악했을 때에는 잠시 해적활동이 주춤했다. 이후 로마가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무렵 다시 해적이 출몰하기 시작한다. 로마의 유명한 카이사르가 청년 시절에 킬리기아 해적들에게 사로잡혔다가 당당히 몸값을 지불하고 풀려나 군사를 이끌고 그 해적들을 몰살시켜 버린 일화는 유명하다. 카이사르 이후 로마 제국은 번영을 누렸지만 내부 정치의 혼란으로 해상권이 약해지면 어김없이 해적이 기승을 부렸다. 로마 제국이 붕괴하고 해상무역이 쇠퇴하면서 해적도 자연 사라지게 되었다.

8∼11세기경에는 ‘바이킹’족이 해적으로 이름을 떨쳤다. ‘바이킹’은 본디 스칸디나비아 반도에 거주하던 북부 게르만 민족인 노르만인들로서 기원전 6000년경부터 원시적인 배를 타고 주변 바다를 여기저기 항해하고 다녔다. 모험을 좋아하고 항해를 즐기던 그들은 로마 말기의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 이후 서서히 역사의 무대에 등장했다. 인구 증가로 거주할 만한 공간이 좁아지자 바이킹은 뛰어난 항해술과 전술로 유럽의 광대한 지역을 누비며 약탈하고 이웃나라를 침공하거나 사람들이 별로 살지 않는 땅을 점령하며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 그들은 민족의식의 자각에 따라 스웨덴인, 덴마크인(데인인), 노르웨이인으로 갈라져 남하 또는 동진하게 되었다. 바이킹의 활동은 바다를 통한 두 번째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으로서 그들의 해적행위는 탐험, 전투, 식민, 무역 등 다양한 민족활동의 일환이었다. 이들은 프랑스까지 진출하여 노르망디 공국을 세웠고,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을 세웠으며 새로운 교역로를 개발하고 상업도시를 건설했다. 이들은 콜럼부스 이전에 미국까지도 진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바이킹은 차츰 현지 주민들과 문화적으로 동화되어 정착함으로써 그들의 해적행위도 사라져갔다.

이후 십자군 전쟁을 계기로 동방 무역로가 열리자 무역의 독점을 노리는 도시국가 사이에, 그리고 서방 세력과 이슬람 세력 사이에 해상 약탈이 자행되었다. 특히 해상무역이 발달할수록 해적행위도 증가했는데 그 가운데는 국왕이나 제후들의 후원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자국의 이익을 위해 한편으로는 상선을 무장시키거나 호위함대를 파견하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해적활동을 지원하여 경쟁국가의 배를 약탈하는 형국이었다. 때로는 해적 행위에 대한 보복으로 상대국의 배를 나포하여 배상케 하기도 있었다.

16세기 영국 엘리자베스 1세 여왕 당시의 전설적인 해적 선장 프랜시스 드레이크는 에스파냐의 상선을 습격, 약탈하여 당시 막강한 해군력을 자랑하던 에스파냐를 자극하였으나 영국 왕실과 국민들로부터는 오히려 영웅으로 대접받았다. 격분한 에스파냐의 펠리페 2세는 무적함대(아르마다)를 이끌고 나섰지만 영국 여왕의 작위를 받은 드레이크는 해상에서 에스파냐군을 격파하였다. 이를 계기로 영국은 해양국가로 발돋움한다. 제국주의 시대에 해적은 식민지 획득에 이용되기도 했는데, 일시적으로 국가 권력의 지원을 받던 이들은 이후 ‘인류의 공적’으로 지목되어 제국주의 각 열강들의 공격을 받고 쇠퇴해 갔다.

<동양>

예로부터 중국의 한구(漢寇), 일본의 왜구(倭寇), 동남아 해적인 만구(蠻寇)는 아시아 지역의 악명 높은 해적이었다.

중국은 남중국해와 동중국해를 따라 복잡한 해안선이 형성된 데다가 섬도 많아서 예로부터 ‘산에는 산적, 바다에는 해적’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해적의 출몰이 잦았다. 기록을 보면 중국 최초의 통일왕조인 진(秦)대부터 해적이 이미 활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중국 해적인 한구(漢寇)들은 중국 왕조가 혼란할 때마다 기승을 부렸는데, 바다에서의 약탈에 그치지 않고 연안의 항구와 도시를 침입하기도 했다.

동양에서 가장 악명을 떨친 해적은 일본 해적인 ‘왜구(倭寇)’다. 왜구는 문헌상으로는 8세기의 기록에 처음 나타나지만 그 이전에도 주요 해상 교통로에는 왜구가 나타났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구는 일본 중앙정부의 세력이 약해질 때 더욱 세력이 커졌는데, 일본뿐만 아니라 우리 나라와 중국 일대에 막대한 피해를 끼쳤다. 왜구 토벌로 힘을 길러 조선을 창건한 태조 이성계가 “나라의 근심이 왜구만한 것이 없다(國家所患莫甚於倭).”라고 했을 만큼 이들의 약탈 행위는 14세기 중엽, 곧 고려 말에서 조선 초에 이르는 시기에 극심하여 한반도 연안에까지 상륙하여 노략을 일삼고 심지어 관(官)의 곡식까지 약탈하기도 했다. 이들은 점차 중국의 산뚱(山東)지방, 저장(浙江), 푸첸(福建)성 근처까지 행동반경을 넓혀 노략했다. 고려와 조선, 그리고 명나라의 조정은 일본에 왜구 근절을 요구하는 사절을 보내기도 하고, 근거지인 쓰시마(대마도)에 정벌군을 보내거나 회유책을 쓰기도 하는 등 대책 마련에 고심하였다. 임진왜란 몇 해 전인 158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적 정지를 명하였고, 에도 막부 시대에 일본이 쇄국정책을 유지하면서 왜구는 쇠퇴해갔다. 현재 출몰하는 동남아 해적의 최대 피해국이 일본이라는 사실은 인과응보라고나 해야 할까.

신라인 장보고의 꿈

9세기 한때, 동중국해 일대의 해적은 소탕되고 평화를 되찾은 바닷길을 통해 국제무역이 번창했다. 이 일을 이룬 사람은 신라인 장보고(張保皐)였다.

어려서부터 물에 익숙하고 무예에 뛰어났던 장보고는 젊은 시절 당나라에 건너가 장교로 복무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당나라와 통일신라, 일본으로 이어지는 해상무역이 성행하였으나 중앙 정부 세력의 약화로 해적이 자주 출몰했다. 신라 해안에 많은 주민들이 해적에 사로잡혀 중국에 노예로 팔리는 모습에 격분한 장보고는 신라에 돌아와 왕에게 무역로를 지키고 해적을 근절할 수 있는 해군 기지를 건설할 것을 건의한다. 왕의 승인을 받은 그는 1만여 명의 병력을 확보하고 완도에 ‘청해진’(淸海鎭)을 건설하여 조정으로부터 청해진대사라는 벼슬을 받는다. 청해진을 설치한 그는 이를 기점으로 해적을 소탕하고 동중국해 일대의 해상권을 장악했다. 이로써 당-신라-일본을 잇는 국제무역이 왕성하였으며 그의 보호 아래 신라 상인은 물론 당과 일본, 아라비아와 페르시아의 상인들까지 안심하고 교역할 수 있게 되었다. 그의 위세는 당과 일본에까지 널리 알려졌는데 이러한 장보고에 대한 기록은 우리 나라뿐 아니라 중국과 일본의 사서에도 잘 남겨져 있다.

장보고는 강력한 군대와 선박과 재물을 보유한 커다란 지방세력으로 성장하여 신라 조정의 정치적 분쟁에도 뛰어들게 된다. 그는 왕위계승분쟁에서 밀려났던 신무왕을 옹립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하여 더욱 큰 세력으로 성장했으나 이에 위협을 느낀 신라 조정이 보낸 그의 옛 부하 염장에게 암살당하고 만다.

“나라의 근심이 해적만한 것이 없다”

20세기 이후, 열강의 해군력 앞에 무릎꿇었던 해적들이 왜 최근 10년 사이에 기승을 부릴까? 이는 새로운 해양시대가 다가오고 있기 때문이다.

해양 전략을 연구하는 김형기 박사(조화전략연구소 소장)는 1984년부터 유엔의 해양법협약(UNCLOS)이 발효되면서 해양에 대한 세계 각국의 관심이 고조되었다고 설명한다. 200해리 배타적 경계수역(EEZ)이 선포되고, 지금까지 육지만 영토라고 생각했던 각국은 이제 바다 영토에 대해서도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해양 자원의 가치도 무궁무진하지만, 경제성과 효율성 측면에서 점진적으로 바다를 통한 물량의 이동이 급증하고 있다는 측면에서 무역로로서의 바다가 다시 부각되고 있다는 것이다.

역사적으로 해상 무역이 활발할 때 모습을 드러냈던 해적이 다시 기승을 부리는 이유도 여기서 찾을 수 있다. 얼마 전까지 어선을 노리던 해적들이 최근 상선을 노리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해적 때문에 해상 무역이 피해를 입고 위축되는 것이 사실이다. 해적은 바다라는 넓은 황야를 자유롭게 누비는 무법자다. 연안 경비대나 해양 경찰이 신고를 받고 뒤늦게 출동해도 인근 섬으로 숨어버려 색출하여 검거하기가 매우 어렵다.

해적 피해를 줄이기 위한 노력은 각국 정부 차원을 넘어 국가간의 공조도 이루어지고 있다. 유엔 해양법협약 제100조에는, “모든 국가는 공해상 또는 어느 국가의 관할권 밖의 다른 장소에서 해적행위를 진압하는 데 최대한 상호 협력해야 한다” 규정하고 있다. 유엔 산하기관인 국제해사기구(IMO : International Marine Organization)에서는 공해상이나 근해에서 해적의 습격시 해당 선박은 가까운 구조조정본부(RCC), 연안국 및 기국(旗國 : 선박의 소속국)에 즉시 그 사실을 알리도록 하고 있으며 신고를 접수한 구조조정본부, 연안국, 또는 기국은 즉각 필요한 모든 조치를 취하도록 규정했다. 국제상공회의소 해사사무국에는 1992년부터 해적신고센터가 설립되어 연간보고서를 발간하고 해적관련 위성방송도 실시하고 있다. 국제선주협회(ISF)에서는 해적 피습시 상황별, 단계별 대응지침을 마련하여 각국에 통보했고, 국제해사기구에서도 선박 소유자, 관리자, 선장 및 선원의 해상강도 대응 지침서를 통보하고 있으며, 각국 정부에게 해적 대응을 위한 권고서를 보내고 있다.

올해 3월과 4월, 도쿄에서는 한국, 중국, 일본, 싱가포르,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등 동남아 16개국과 국제해사기구 및 국제상공회의소 등 12개 단체가 모여 아시아국가 해적방지대책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에서는 해적·해상 강도 단속 및 대응을 위한 정보 연락 창구 개설, 수색 공조 등 국가간의 공동협력방안과 보안대책이 폭넓게 논의되었다.

정부에서는 <해적 피해방지 대응요령>을 이미 정부관계부터 및 해운업체·단체, 선박종사들에게 배부한 바 있다. 그리고 대외적으로 중국, 일본, 러시아의 해상치안기관들과 정례 회의를 통해 국제 공조협력체제를 강화하고 있다. 올 하반기에는 말레이시아 해양경찰과 정보를 교류하고 협의체 구성을 추진할 계획이며 10월 30일부터 3일간 서울에서 개최되는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 Asian Regional Forum)에서는 해적피해 방지를 위한 국제협력이 다시 논의할 계획이다. 그외에도 군사외교활동을 강화하고 해적 피해방지를 위해 인공위성 위치추적시스템(SHIPLOC)를 개발하여 선박에 탑재하도록 한다는 계획을 가지고 있다.

더욱 적극적으로 해적 피해를 막으려면 해군력의 강화가 필수적이다. 해적들이 미국 국적의 배에는 쉽게 접근하지 못하는 이유도, 함부로 건드렸다가는 5대양을 누비는 미 해군의 확실한 응징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보면 우리도 해군력을 증강시켜야 하겠지만 그 비용이 이만저만한 것이 아니라서 해양대국은 아직 꿈결같기만 한 이야기다. 최근 국내에서 장보고가 21세기의 새로운 인간상으로 부각되는 이유도 이런 아쉬움에서가 아닐까.

지난 4월, 조선일보는 창사 80주년을 기념하여 <한민족대항해시대>라는 주제의 전시회를 열었다. 한국의 지난 100년사를 돌아보고 21세기를 전망한 이 전시회에서는, ‘우리 지도를 돌려놓고 볼 때 한반도는 더 이상 극동아시아에 치우친 국가가 아니라 전세계를 잇는 세계 해양 교통의 요충지이며, 우리가 눈을 돌려 해양으로 진출할 때 무궁한 발전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지도를 돌려놓고 바다를 바라본다는 발상이 흥미롭다.

21세기를 맞이하기 직전부터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 해적들은 인류에게 바다의 중요성을 다시 일깨우고 있다. 우리 나라도 지금 기로에 놓여 있다. 천백여 년 동안 잊어버리고 있었던 장보고의 꿈이 다시 실현되어 세계의 바다를 누비든, 해적 피해로 인해 해상 무역이 오히려 위축되고 경제난에 다시 허덕이게 되든, 선택은 전적으로 이 시대 우리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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