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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고려시대의 기록물 보존관리
작성자 알짜돌이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1212
<고려시대의 기록물 보존관리>

고려 태조 왕건은 종래의 교학이나 사상 및 민간신앙의 유지발전에 남다른 열의를 보였으나 왕권확립의 문제로 인해 특별한 도서육성책은 찾아볼 수 없다. 6대 성종때에 왕권이 확립되고 중앙과 지방의 관제가 새로운 체제로 구축된 8대 현종때에 이르러 국가의 기반을 닦을 수 있었다.
성종은 16년간 재위하면서 국자감·비서성의 설립을 비롯하여 기록물을 비치할 서고를 설치하는 등 문교진흥정책에 진력하였다. 그는 즉위 14년(995) 관제와 직명을 전면적으로 개정, 숭문관을 홍문관으로 하고 내서성을 비서성으로 개편 확대하였고, 7사 이외에 비서성, 국자감, 전중성, 소부감, 군기감, 사천감, 대의감을 설치하였다.
성종은 또 서경에 수서원을 설치하고 사적을 초서하여 이 곳에 유교서적 및 판본의 소장뿐만 아니라 열람, 수집, 보관, 정리, 이용, 교환, 담사를 하게 하고, 학술연구 조성기관의 기능을 수행토록 하였다.
왕립문헌보존처인 비서성과 수서원에는 중국사서와 함께 신라 이래의 동방서적이 소장되어 있었다.
문종 초년경에는 비각이라는 서고가 왕실 주변에 건립되어 문교발전의 직접적인 자료로 사용되었다. 이 비각은 숙종 이전 명칭이며, 예종때에 이르러 삼각이라 일컫는 청연각·보문각·천장각으로 개칭하였다. 또한 숙종시대에는 궁중서고인 문덕전뿐 아니라 중광정·장령전, 연경전 같은 왕실 주변의 서고가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다.
중광전은 왕부의 하나로 여기에 다수의 서적을 소장하던 곳으로 이 장서처는 인종 16년에 안강전으로 개칭되었다.
장령전은 숙종 이래의 장서처로서 서적의 편교도 여기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때로는 불사, 열무, 사신의 접견 등도 이곳에서 거행했다. 장령전은 이자겸의 난으로 소실되고 인종 16년에 새로운 궁궐이 준공된 후 천령전이라 개명하였다.
연영전은 숙종때의 대표적인 기록보존처였으나 이자겸의 난으로 역시 소실됐다가 인종 16년 신축시 집현전이라 개칭되었다.
예종은 즉위 원년(1106)에 해동비록이라는 지리관계 서적을 편찬케 하였고, 12년(1117)에는 천장각이라는 서고도 궁중에 두어 귀중한 조서·어필·서화 등을 보관·열람케 하였는데 이 천장각은 송제를 모방하여 궁중에 둔 기록보존처였다. 뿐만 아니라 궐내에 청연각을 설치하여 사부서적을 소장하였고, 그 외에 궁중에 보문각·임천각이라는 장서처를 두고 수만권의 장서를 소장하였다. 청연각은 원래 예종 11년(1116)에 경연을 위하여 설치된 곳이고, 보문각은 청연각이 궁중에 있었기 때문에 학사의 출입이 어려워 세운 장서처로 청연각이 경연처였다면 보문각은 학사들의 회강지처로서 기능이 확대되어 대표적인 왕실서고로 발전하였다. 이 보문각은 충렬왕 원년에 보문서로 개칭되었다가 같은 해에 동문원에 병합되었고, 충숙왕 원년(1314)에 다시 보문각으로 개칭되었다.
임천각은 인종때 궁중에 있던 장서각으로 이곳에 소장되어 있던 수만권의 장서중 삼국시대 이래의 문적과 당·송의 귀중한 서적이 많이 보관되어 있었다. 이 장서 또한 이자겸의 난과 탁준경의 난으로 소실된 것으로 추측된다.
인종은 김부식에게 <삼국사기>를 편찬 간행토록 하는 한편 식목도감을 두어 학제를 형성토록 하고, 국자감을 보강하고 향학을 세워 인재를 육성하였다. 국자감은 성종때 중국의 제도를 본따 창설한 교육기관으로 태조 이래 운영해 오던 경학을 확충한 것이다.
고려시대에는 이상과 같은 장서처외에 어서국 사루, 문첩소, 서적소, 서적포와 주자인소의 서적원 등을 설치하여 수많은 서적을 소장하였다.
이 중 문첩소는 보문각의 부설기관으로 그 기능은 분명치 않으나 국가기록문서만을 수집보관하던 전형적인 문서기관으로 보인다.
서적소는 이자겸의 난으로 궁궐이 소실되어 보문각의 기능이 폐지되었을 때 임시로 서적을 이장하고 경사를 강독케 하였던 곳으로 보문각의 임시청사라 할 수 있다.
서적포는 숙종 26년 국자감 부설로 설치된 장서처로서 비서성에서 이관된 판본 중 훼손된 것을 옮겨 모인(摹印)케 하는 한편 국자감의 교육에 필요한 서적의 부족을 충당하기 위해 둔 것이다. 이 서적포는 고려시대에 있어 교재출판을 겸한 기능을 겸한 곳이다.
이상과 같은 왕실 중심의 기록물 보존처 외에 전국에 산재한 사찰문고 또한 경서 중심이긴 하지만 기록물 보존처로 한몫을 하고 있다. 고려시대에는 불교를 국가나 개인의 현세에 있어서의 행복을 좌우하는 현세이익이 종교로 생각하여 태조 이래로 국가나 왕실의 융성을 기원하기 위하여 사찰이 건립 또는 보존확충되었기 때문에 대찰은 대부분은 국찰이었다. 따라서 여기에서 이루어진 장서의 개판도 국비로 이루어졌고, 장경각이나 경판각은 물론 그 내용인 경판이나 경전도 국가소유였다. 고려대장경의 조판과 보관이 그 대표적인 예에 속한다.

@속기계 37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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