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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공자도 인육을 즐겨 먹었다 !?
작성자 알짜돌이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1797
<세계의 식인문화>

영화<신장개업>에 나오는 중국집에서만 인육을 먹었을까?

영화 <신장개업>을 보면 괴기스러운 분위기의 아방궁이라는 ‘중국집’은 자장면 맛이 일품이다. 그 원인은? 경쟁업체에서 추적하여 알아보니 인육, 즉 사람고기를 썼기 때문이었다.

우리 나라에서 ‘중국집’으로 불리는 중화요리 식당은 음식 맛이 좋을 때 흔히 ‘인육을 쓴다’는 루머가 흘러나오기 일쑤였다. 그런데 실제로 중국인들은 청조 말까지 인육을 시장에서 거래했고, 중화민국을 거쳐 중화인민공화국이 성립된 직후까지도 일부 지방에서는 인육을 먹었다!


공자도 인육을 즐겨 먹었다

식인문화는 중국 4천년 역사에 면면히 이어져 내려왔다. 한나라가 건국된 기원전 206년부터 청나라가 멸망한 1912년까지, 중국에서는 식인의 기록이 220차례나 정사(正史)에 기록되어 있다.

최초의 식인 이야기는 중국의 전설적인 왕조인 하나라 당시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아들을 죽인 원수를 죽여 육장(肉醬)을 만들어 원수의 아들에게 먹기를 강요한 여인 이야기다. 유교는 ‘복수주의’를 인정할 뿐 아니라 오히려 장려한 면이 있어 복수에 의한 식인행위가 있었다. ‘부모의 원수와는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불구대천’, 不俱戴天)’는 생각으로 심하면 부친의 원수를 29대까지 갚기도 했다. 복수할 때는 한 칼에 숨통을 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천 갈래, 만 갈래로 잘랐으며 때로는 고기를 잘라먹고 심장과 간을 꺼내어 씹어먹으며 뼈까지 갈아먹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예로, 측천무후 당시 잔혹한 고문과 형벌로 유명했던 내준신이 처형되었을 때에는, 군중들(그에게 처형당한 이들의 가족들)이 다투어 그의 고기를 잘라먹었다고 한다.

황제는 법률로 ‘살육의 형’을 규정했다. 이는 주나라 때의 율령 체제부터 등장하지만 이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식인 기록이 나타난 최초의 정사인 <사기(史記)>는 중국 최초의 역사왕조인 은 왕조(주나라 이전의 왕조)의 마지막 임금 주왕이 신하들을 ‘해’( , 인체를 잘게 썰어 누룩과 소금에 절인 고기), ‘포’(脯, 저며서 말린 고기), ‘자’(炙, 구운 고기)로 만들었다고 기록했다. 해, 포, 자는 이후 중국 춘추전국시대까지의 인육 조리법의 대표격으로 계속 등장한다.

춘추시대 노나라 사람인 공자는 이 ‘해( )’를 즐겨서 해 없이는 식사를 안 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 그러나 공자가 아끼던 제자 자로가 위나라의 신하로 있다가 왕위다툼에 휘말려 살해되고, 그의 시체는 잘게 토막내어져 해로 만들어지고 말았다. 이 해는 사자에 의해 공자의 식탁에까지 전해졌다. 이 일 후로 공자는 그렇게 좋아하던 해를 먹지 않았다.

중국 역사사회에서는 생존경쟁의 패자가 승자의 먹이로 식탁에 오르는 일이 다반사였다. 그리고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식인이 자행되기도 했다. 춘추전국시대의 유명한 제나라 환공은 미식가로도 유명했다. 그가 진미를 찾자 요리사인 역아(易牙)는 자기의 장남을 잡아서 삶아 바쳤다. 역아뿐 아니라 극한 상황에서는 자기 살을 베어내거나 아내나 자식을 잡아 주군을 대접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고, 흔히 이런 경우는 충성으로 기려졌다.

인육은 가끔 약용으로도 쓰였다. 이시진의 <본초강목(本草綱目)>에는 인체 각 부위의 약효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통념에다 ‘효’라는 유교 사상의 실행으로서, 병으로 죽어가는 부모에게 자신의 넓적다리살 등을 잘라서 봉양하는 일은 더욱 흔했다. 단, 이런 일이 진정한 효행인가 하는 정치적인 논란이 벌어지기도 했는데, 당시의 황제 뜻에 따라 어떤 시대의 사람들은 ‘효자’로 표창을 받았고, 다른 시대 사람들은 신체를 훼손한 ‘불효자‘로서 매를 맞은 후 귀양을 갔다.

수·당대에는 인육시장이 출현했고, 인육애호가가 열전(列傳)에 기록되기도 했다. 송 말기부터 원대에는 <철경록(輟耕錄)>이라 하여 인육 요리법을 자세히 적은 요리책까지 출판되었다. 원나라를 방문한 마르코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자신이 목격한 복주(福州)의 식인 풍습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이 지방에서 특별히 기록할 만한 것은 주민들이 그 어떤 불결한 것이라도 가리지 않고 먹는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고기라도 병으로 죽은 것만 아니면 아무렇지 않게 먹는다. 횡사한 사람의 고기라면 무엇이건 즐겁고 맛있게 먹는다. 병사들은 잔인하기 짝이 없다. 그들은 머리 앞부분을 깎고 얼굴에 파란 표식을 하고 다니면서 창칼로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죽인 뒤, 제일 먼저 피를 빨아먹고 그 다음 인육을 먹는다. 이들은 틈만 나면 사람들을 죽여 그 피와 고기를 먹을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중국의 식인 풍습은 <삼국지>, <수호지>, <서유기> 등 유명한 중국 고대의 소설에도 잘 나타나 있다. <삼국지>의 경우, 정사로 기록된 진수의 삼국지에는 유비가 즐겨먹은 음식이 인육으로 만든 포였다고 하며, 여포가 죽은 후 그 고기를 죄인들에게 먹였다고 한다. 소설 <수호지>에서는 인육으로 고기만두를 만들어 파는 악한이 등장하고, <서유기>에서는 고승(高僧)의 고기가 불로장생의 영약이라 하여 삼장법사가 끊임없이 요괴들의 공격을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인육의 판매를 금지하는 법이 송나라 때에 만들어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에 이르기까지 인육은 시장에서 공공연히 매매되었다. 1918년, 중국 근대의 사상가 노신은 <광인일기(狂人日記)>에 식인의 피해망상증에 걸린 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켜 식인 풍습이 만연한 사회상을 폭로했다. 그는 또한 ‘국가는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사회‘라고 정의한 바 있다. 중국 5·4운동의 사상적 지도자 오우(吳虞, 1874∼1949)는 ‘유교 = 식인’이라 하며 강력히 유교를 비판했다. 식인풍습은 공산화된 중국에서 유교의 폐해 중 하나로 비판되었고, 최근에 이르러서야 점차 사라져갔다. 오랜 역사와 문화를 자랑해 온, 유교문화의 종주국인 중국에서 식인 풍습이 꾸준히 이어져 내려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역사의 단면이다.


남미와 기타 지역의 식인풍습

중국의 경우에는 문명화된 사회에서 식인이 행해졌지만, 그외 지역에서 있었던 식인풍습은 일반적으로 미개사회에서 행해졌다. 남미의 원주민들은 오랜 식인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남미의 여러 원주민 종족들이 행한 식인풍습은 몇 가지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로, 장례의 일부로서의 식인이며 이런 경우는 차라리 인간적이다. 오리노코 강 상류의 촌락에 사는 구이아카족들의 매장 식인풍습이 그 좋은 예다. 그들은 죽은 사람을 화장하고 남은 뼈를 조심스럽게 모아 절구에 넣고 간다. 장례식이 거행될 때 친척들은 이 가루를 국과 섞어서 서로 나누고 마신다. 슬프게 한탄하면서. 종족에 따라 죽은 사람의 신체 일부만 태워서 먹기도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그 재나 뼈를 먹는 것은 화장의 연장이었고, 일종의 제의였다.

둘째로, 인신공희(人身供犧) 의식으로서의 식인풍습이 있다. 이는 죽은 사람을 먹는 것이 아니라, 신을 기쁘게 하기 위해 산 사람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다. 지금부터 200∼300년 전만 해도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에서는 전쟁 포로나 자국의 청년 남녀를 제단에 올려서 묶은 다음 희생자의 가슴을 열어젖히고 심장을 끄집어내었다. 캐나다의 휴런족에게도 포로를 밤새 괴롭힌 후 태양이 떠오르면 죽이는 희생의식이 있었는데 이는 전쟁과 태양의 신을 기쁘게 해 주려는 용도였다. 의식이 끝나면 죽은 포로의 몸을 놓고 인육잔치가 벌어진다.

셋째로, 적개심의 고취와 적의 세력 약화를 위한 식인이었다. 흔히 우리가 떠올리는 ‘식인종’들은 대부분 이런 유형이다. 이런 경우, 흔히 포로들은 죽기 전에 극심한 고문을 당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방법으로 죽인 포로의 시체를 먹음으로써 적에 대해 증오를 표출하고, 자기 부족에게는 ‘식량’을 제공하게 된다. 이런 경우, 두 번째와 비슷한 인신공희 성격이 가미되기도 한다.

문명화된 사회에서 식인은 야만적인 것으로 규정된다. 그러나 기아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이성이 마비되면 언제든 식인은 일어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중국에서도 기근으로 인해 식인행위가 자행되었던 적이 종종 있었다. 기원후 70년, 예루살렘 성이 로마군에 의해 몇 달 동안 포위되었다가 성안에서 식량이 떨어졌을 때의 참상을 고대의 역사가 요세푸스는 이렇게 묘사한다.

그녀는 다른 사람들을 위해 양식을 마련하는데 지쳤고, 또 어느 곳에서도 양식을 구할 수 없었다. 굶주림은 창자와 골수에까지 사무쳤고, 분노는 굶주림 그 자체보다 더 격렬하게 타올랐다. 격분과 굶주림 때문에 이성을 잃은 그녀는 아직 품안에 있는 어린 아들을 붙잡고 말했다. ‘불쌍한 아가야! 이 전쟁과 기근과 분쟁의 와중에서 어떻게 너를 보호할 수 있겠느냐? 우리는 로마군에게 포위되어 있기 때문에 살아남는다고 해도 그들의 노예가 될 것이다. 그러나 굶주림은 노예가 되는 것보다 더 견디기 힘들며, 암살자들은 굶주림이나 노예제도보다 더 잔인하단다. 그러니 너는 나의 양식이 되고 암살자들에게 보내는 나의 분노가 되며 유대인들의 불행에 종지부를 찍는 마지막 이야기가 되어다오.’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서 자기 아들을 죽여서 구운 뒤 절반은 자기가 먹고 나머지는 덮어두었다.

이런 일들이 1900년도 더 지난 현재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알려진 북한의 참상이 바로 그것이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극심한 기근에 시달리는 북한에서는 어린아이를 잡아다가 창자는 순대로, 고기는 국밥으로 만들어 판 일가족이 처형당한 사건도 있었다.

일부 문화인류학자들은 우리가 일컫는 ‘야만인’들의 식인 풍습을 야만으로 규정하기보다는 그 사회에서 부족한 식량 또는 영양을 섭취하기 위한 필요악이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약육강식의 짐승 세계처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는 이제 소멸될 때가 되었다. 극한 굶주림의 상황에서 귀여운 자식을 고깃덩어리로 보게 되는 비극도 지구상에서 사라져야 한다.

문제는 ‘야만인’들의 식인풍습이 아니다. 유교문화가 발달한 문명국인 중국에서 수천 년 동안 인육을 먹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복수’라는 개념과 ‘충효’라는 사회 통념 속에 인육을 먹는 일이 용납되어 버린 까닭이다. 비단 중국의 식인풍습뿐 아니라 역사 속에서 얼마나 많은 ‘문명인’들이 ‘문명’이라는 이름으로 다른 인종, 다른 문화, 다른 종교와 역사에 대해 증오를 표출하며 얼마나 많은 살육을 자행했던가. 이런 의미에서 지금까지의 역사는 노신의 표현처럼 ‘사람이 사람을 먹는 역사’였는지도 모른다.
세계대전 당시에 어느 식인종 추장이 남겼다는 말은 의미심장하다.

“참 이상하다. 우리들은 먹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런데 당신들은 먹지도 않으면서 왜 그렇게 많은 사람을 죽이는가?”^^;

@출처 : 월간 지구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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