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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기>조선왕조시대의 기록물 보존관리
작성자 알짜돌이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1575
<<조선왕조시대의 기록물 보존관리>>

조선왕조의 대표적인 4대 기록보존처는 집현전·홍문관·규장각·성균관이다. 이들 국가기관들은 모두 인재를 양성하는 학문연구기관이기도 하다.


ㅇ집현전
집현전은 고금의 경적을 비치하고 경사를 강독케 하기 위해 궁중에 설치한 관청으로 일종의 학문연구기관이었다. 고려시대에 이와 같은 제도로서 보문각·수문전·집현전이 있었는데 세종 2년 종래의 제도상으로는 명칭만 있었던 보문각과 수문전을 없애고 집현전만 궁중에 두어 학문의 관서로 한 것이다. 이 집현전의 설치목적은 유교를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왕도정치를 이룩하는 데 있어 학문적 뒷받침이 될 수 있는 중추적 기관으로 삼으려 했던 것이다. 그래서 세종 때에 집현전은 경연관으로서의 기능을 위해 출범했으나 세종의 집현전에 대한 관심과 시대적 요청에 의해 '사대문서작성' '가성균관직' '복서' '교정' '사관' '사신' '지제교' '고제연구' '경찬사업' '풍수학관' '종학교관' 등의 순으로 확대되었다.
집현전의 주요임무는 경적을 간행·편집하고, 장서를 보관하는 일이었다. 이곳에서는 경연에서의 강학 및 연구를 위하여 서적을 편찬 간행하는 한편 서적의 구입 혹은 납본을 받아 세종 11년(1492)에 새로 건축된 집현전 내의 규장각에 소장하였다. 특히 세종은 중국으로부터 서적을 구입함과 아울러 서적을 납본한 자에게는 원하는 바에 따라 포백을 주고 매우 중요한 서적을 납본하는 자에게는 관작의 상까지 내려 집현전의 장서수는 만여권에 달했다.
집현전의 장서는 사분 분류법에 의해 정리하였고, 그 구별을 쉽게 하기 위하여 사부 표기법에 따라 圖書箋(도서전: 레이불)의 색깔을 달리하여 경부에 홍색전, 사부에 청색전, 자부에 황색전, 집부에 백색전을 사용하였다.
또한 세종 11년(1429)에는 집현전에서 경선소장의 책에 표기가 없어서는 아니되나 '경선' 두 자의 인을 만들어 매권의 권두에 표시하고, 또 '내장' 두 자의 인을 만들어 도서가 내사되는 동시에 착표할 수 있게 되었다. 그 후 집현전이 세조 2년에 폐쇄됨에 따라 집현전의 장서는 예문관 소관으로 되었다.

ㅇ홍문관
홍문관은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에 걸쳐 왕실의 서적을 관리하며 문서와 서한을 맡아 처리하고 왕의 고문(顧問)에 대비하기 위해 설치된 관어로, 옥당·옥서 또는 영관 등의 별칭이 있었다.
홍문관은 원래 고려 성종 14년 숭문관을 고쳐서 홍문관이라 칭하고 학식이 뛰어난 문신을 택하여 학사로 하고 도서의 출납을 맡아 보는 곳이었다.
조선 세조는 집현전을 폐하고 거기에 소장돼 있던 장서를 모두 예문관에 이관시켰는데 예문관에 소장됐던 장서는 성종 9년 당시 장서기관으로 유명무실했던 홍문관에 보내졌다.
홍문관은 장서수집은 대체로 외국과의 무역에 의한 구입, 사본제작, 납본 등의 방법으로 이루어졌다. 만약 국내에서 구하지 못하는 서적은 호조에 구입 요청을 해서 중국으로 부터 구입, 납본토록 했다. 그리고 사본은 왕의 하교에 의해서, 혹은 홍문관에서 왕으로부터 재가를 받아 제작토록 하였다.
그리고 교서관을 비롯한 기타 경사에서 인출하는 모든 서적은 반드시 홍문관에 1부씩 납본토록 했다.
홍문관에 소장된 장서는 수만종에 달하는데 그 대부분이 고려시대부터 전하여 온 것이었다. 그러나 선조 25년(1592) 전란으로 인해 대부분의 장서가 소실되었고, 전란 후 홍문관의 장서는 인조 이후 각처에 남아있던 서적과 중국에서 수입한 서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리고 정조 때는 규장각의 건립과 함께 홍문관 장서의 일부를 규장각으로 옮겼고 홍문관에서도 계속 도서를 수집하였다.
홍문관에 소장되는 도서는 등영각이라는 장서각에 소장하였으며, 서책의 맨 첫장에 '홍문관(弘文館)'이란 주인을 찍었다.

ㅇ규장각
규장각은 조선 선조 때에 동지중추부사 양성지의 건의에서 비롯되었다.
양성지는 "군주의 어필, 시문을 감진(勘進)하여 인지당 동별실에 봉안하고 명칭을 규장각이라 하며 서적을 보관하는 내각을 설치하고 명칭을 비서각이라 할 것"을 세조에게 건의하였으나 윤허받지 못했다. 하지만 숙종 25년(1694)에 이르러 종정사내에 소각이 별건되고 열성어제·어서가 봉안되었으며, 숙종이 친필로 '규장각(奎章閣)'의 편책을 써붙였는데 이것이 실질적으로 규장각의 시초라 볼 수 있다.
정조는 즉위 원년에 창덕궁 북원에다 일각을 건립하고 열조의 어제·어서를 봉안하고 각의 이름을 처음 어제각이라 하였다가 규장각이라 개칭하였다.
정조의 규장각 설립 목적은 표면적으로는 정조의 어제·어필을 봉안한다는 것이었으나 실제로는 문화정치 보조기관으로서의 역할 감당에 있었다.
규장각은 내각과 외각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각에는 금문원·봉모당·이안각(일명 비향각)·열고관·개유와·서고 등의 부대시설이 있었고, 외각에 교서관과 강도외각이 있었다.
금문원은 내각의 모든 사무를 관장하는 곳으로 어제·어필·선원보첩 및 내부의 서적에 관한 사무와 일성록 및 내각일력의 편찬을 맡아보았다. 또한 서적의 수집·정리·출납과 어제·어필 등의 봉안은 반드시 금문원을 거쳐서 하도록 하였다.
봉모당은 열조의 어제·어필·어서·고명·유고·밀교 및 선보, 상지 등을 봉안하였던 곳으로, 그 내용물은 주로 영조의 것들이다. 이안각은 본래 서향원이라 하였으며, 주로 어진·어제·어필 등을 봉안하였던 곳이며, 중국도서를 주로 소장하였던 열고관 역시 규장각의 부속서고로서 '세화본도적(歲華本圖籍)'이라 하여 규장각 서목 제3권에 수록되어 있다.
개유와는 열고관과 마찬가지로 중국도서를 소장하였던 곳으로 이곳은 6·25동란 때 소실되었다.
서고는 동본도서 즉, 조선본을 소장하던 곳이며, 교서관은 예각·내서성·비서성 또는 전교서라 하여 경전의 인행·향축인전 등에 관한 일을 관장하던 관어로,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있었던 것이다. 이 교서관은 세종조에는 전교서라 하였고, 성종조에는 다시 교서관이라 불렀다.
강도외각(규장외각)은 강화도에 있던 것으로 이곳은 지형적으로 요새지여서 전란시 주요 피난처가 되었으며, 임진왜란 직후인 선조 28년(1595)에 중요한 경적이 최초로 이안 또는 봉안되었다.
즉, 선조 25년 임진왜란의 화를 모면한 왕조실록 전주사고본은 난을 피하여 해주·묘향산 등지로 전전하다가 선조 28년 강화도 마니산 남쪽 흥왕사의 궁궐 안에 사고를 짓고 그 곳으로 이안하였다가 정족산성 내에 사고를 다시 짓고 실록을 이 곳에 옮겨 한말까지 계속 보관케 하였다.
효종은 강화도 사고 옆에 별고를 건립하고 여기에 국왕의 교명·책보·열조의 어제·어필 및 고금의 서적도서등을 봉안하였으며 정조는 즉위 5년에 외규장각의 제를 정하고 강화유수 서호수에게 명하여 외규장각을 별건토록 하였다.
이상에서 살펴본 규장각은 왕실 도서관으로서 장서의 수집, 정리 보존관리처로 사용되었고, 정조는 즉위 원년에 고금도서집성 5,022권을 중국에서 수입하고 구 홍문관과 강화행궁의 장서였던 명연소사의 제본을 모아 규장각의 장서로 함으로써 정조 5년까지 수집된 도서수는 무려 3만여 권에 달했다 한다.

ㅇ성균관
성균관은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교육기관으로 국학·태학·국자감·반궁·현관 등의 별칭이 사용되었다. 이 성균관은 태조 7년에 건립되었고, 여기에 부설된 장서각인 존경각에는 교수와 관원 그리고 학생이 필요로 하는 서적을 모아 소장하였다. 성종 6년(1475) 성균관에 세워졌던 존경각은 중종 9년(1514)의 화재와 임진왜란으로 인해 소실되어 소장되었던 서적의 내용과 양은 알 수 없으나 조정에서는 서적을 간행할 때마다 성균관에서 하사하였고, 특별히 이조에 명하여 중국으로부터 서적을 구입하여 소장케 하였던 것이다.


<조선왕조시대의 사고(事故)>

조선왕조는 역대 왕조가 전란과 병화로 귀중한 사료들을 올바로 보존하지 못한 실책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사고제도'운영에 많은 노력을 기울여왔다.
개국초에 내사고로서 서울에 춘추관을, 외사고(外史庫)는 충주·성주·전주의 세곳에 각각 사고를 설치하였다.
춘추관은 시정의 기록을 맡은 관어로서 서기 503년 국권이 상실할 때까지 내사고의 역할을 겸했다.
조선왕조 최초의 외사고(外史庫)는 충주사고이다. 성주·전주의 양 사고가 세종 21년에 창설을 명한 기록 등으로 보아 이 충주사고는 해인사에 있던 고려시대의 것을 그대로 소장한 듯 하다.
김길손의 전주실록각기를 기초로 국초의 사고, 즉 충주·성주·전주의 각 사고에 왕조실록을 나누어 보관한 해는 세종 27년(1445)이다. 그때 춘추관에 태조실록 15권, 공정왕실록 6권, 태종실록 36권 등 각 4부를 작성, 1부는 춘추관의 실록각에 소장하고, 다른 3부는 충주·성주·전주의 삼외사고(三外史庫)에 나누어 소장했다고 한다.
조선왕조시대의 주요 외사고는 다음과 같다.

ㅇ충주사고
충주사고는 조선왕조시대 최초의 외사고이다.
세종 13년(1431) 4월에 태조실록·공정실록·태종실록 등 3대실록을 이 사고에 봉안하고 성종 8년 가을에 세조·예종실록을 성주·전주사고와 함께 이 충주사고에도 봉안했다. 그러나 이 사고는 임진왜란이 발발하면서 태조부터 명종까지의 실록과 함께 소실되고 말았다.

ㅇ성주사고
성주사고는 세종 21년(1439)에 개설되었다. 이 사고는 중종조의 실화와 선조조의 병화로 소실되었다. 그 후에도 역대실록을 계속 이곳에 봉안했으나 선조조의 임진왜란시 병화를 만나 실록과 장각은 없어지고 재건을 보지 못했다.

ㅇ전주사고
전주사고는 세종 27년에 개설되었고, 이 사고만이 임진왜란시 유일하게 난을 피하여 온존하게 보존되었다.

ㅇ마니산사고
마니산사고는 뒤에 정족산사고에 옮긴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인 선조 39년 경적 봉안의 적지로서 효종조의 어제·어필·교명·책보·고금서적·도서가 봉안되었다. 이 사고는 최근세까지 존속되다가 1919년에 파괴되어 현재는 초석만이 남아있다.

ㅇ묘향산사고·오대산사고·태백산사고
묘향산사고·오대산사고·태백산사고는 모두 임진왜란 후 선조 39년에 신설되었고, 이중 특히 오대산사고는 임진왜란 직후 건축물의 특색을 지닌 건물로 건축사적 측면에서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ㅇ적장산사고
무주의 적장산사고는 광해군 6년에 창건된 것으로 인조 때에 묘향산사고가 안전한 곳이 못된다 하여 묘향산사고의 장서를 이곳에 이전하고, 묘향산사고는 폐지되었다.

@속기계 37호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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