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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궁예, 그는 누구인가
작성자 알짜돌이 작성일 2004. 4. 4. 조회수 1496
요즘 저는 대하드라마 '왕건'에 푸~욱 빠져있답니다.
TV를 보다 문득 아! '궁예'를 취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여^^; 여러분도 궁금하시져~~
다들 알고 계시다구요? -_-
바뜨!! 저같이 아직도 자세히 모르고 계시는 분을 위하야~! 휘리릭~~
담번엔 왕건.



<궁예, 그는 누구인가?>

나를 애꾸눈이라 한다면 당신도 '애꾸눈'
'애꾸눈 왕' 궁예. 그는 누구인가? 심각한 정신분열증에 사로잡혀 제멋대로 칼날을 휘두른 폭군인가? 더 나은 이상세계를 꿈꾸다 끝내 좌절하고만 비운의 제왕인가? 보통 사람들의 머리에는 아무래도 후자보다 전자가 더 깊숙히 각인되어 있을 것 같다.

사실 후삼국을 주름잡던 주역중의 한 명인 궁예는 역사속에서 신하는 물론 아내와 두아들까지 무참히 죽이는 살인마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누가 말했는가? 역사는 승자의 기록일 뿐이라고. 타임머신을 타고 그 당시로 거슬러 올라가 확인해 보지 않으면 모를 일이다.

KBS 대하 역사 드라마 '왕건' 인기

최근 KBS에서 대하 역사드라마로 인기리에 방영되고 있는 '왕건'의 한 장면. 지금의 개성인 송악에 황궁을 지은 궁예는 자신을 스스로 미륵이라 칭하며 카리스마를 발휘한다. 왕건의 연인인 연화를 아내로 맞이해 황제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고 신라의 관제를 버리고 독특한 체제를 마련한다. 그러나 얼마 안가 왕건과 연화 사이를 알게되면서 주변의 모든 사람들을 의심하고 살생을 저지르다 고구려 승계를 바라는 호족들에 밀려 권좌에서 쫒겨나는 비참한 말로를 걷게 된다.

그러고보면 궁예는 애초부터 비운의 운명을 지니고 태어난 인물이라 할 수 있다. '삼국사기' 궁예전에는 "궁예는 신라사람이요 성은 김씨"며 "아버지는 47대 헌안왕 혹은 48대 경문왕"이라고 적고 있다. 엄연한 신라의 왕족이다.

그러나 '제왕운기' 후고구려기에는 "신라 임금 경문왕이 서자를 낳았더니 이가 두겹이라 목소리도 겹쳐졌네. 얼굴이 임금에게 해롭다고 내쫒으니 중으로 행세하며 몰래 돌아다녔네"라고 출생 비화를 밝히고 있다.

태어날 때부터 이가 돋아난 궁예. 이는 궁예가 애꾸눈이 된 사연이기도 하다. 궁예는 태어나자마자 죽이라는 왕의 명을 받은 내시에 의해 궐 밖으로 내던져졌는데 다행히 유모가 받아 목숨은 건졌으나 바로 이때 한쪽 눈이 손가락에 찔려 시력을 잃게 됐다고 한다.

이처럼 궁예는 출생부터 사후까지가 온통 미스터리다. '삼국사기'에는 궁예가 나이 10여세가 되어도 장난이 그치지 않으므로 유모가 "네가 태어나자 나라에서 버려 내가 차마 어쩔 수 없어 몰래 숨어 길러 오늘에 이르렀다. 네가 이렇게 장난이 심하면 다른 사람이 알게 될 터이고 그러면 나와 너는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이를 어찌하랴?"라고 한탄하는 대목이 나온다.

이때까지만 해도 후대에 '정신분열자' '과대망상자'라는 소리를 들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나중에 세달사를 거쳐 기훤과 양길의 휘하에 들어가 큰 공을 세운 궁예는 부하를 자신처럼 아끼고 사랑하는 공명정대한 지휘관으로 성장한다.

궁예를 부정적으로 묘사한 '삼국사기'에서 마저 사졸과 함께 달고 쓰고 힘들고 편안함을 같이하는가 하면 공과 사를 구분할 줄 아는 엄정한 장수로 그리고 있다. 이런 덕망과 수업을 쌓은 궁예는 신라에 반대하는 호족 세력을 기반으로 삼아 장군으로 추대된 인물이다. 그러나 뒤집어 생각해보면 896년 '고려'라는 나라를 세운 이래 18년 제위동안 국호를 마진으로, 다시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꿀 만큼 호족들과의 사이에서 수많은 역경과 고뇌를 치른 왕이라 할 수 있다. 마진은 범어로 마하(크다)와 진단(중국)의 약어로 대동방국을 의미한다. 다시말해 궁예는 고구려라는 특정국가를 계승하기 보다는 신라와 백제는 물론 그 이상의 대륙까지 아우르는 통일 대제국을 마음속에 품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 때문에 고구려계 호족들은 반발하게 되고 점차 입지가 흔들린 궁예는 '이국이나 다름없는' 송악을 떠나 처음 도읍을 정했던 철원으로 천도를 단행한다.

호족들과 갈등속에서 몰락

911년 궁예는 다시 국호를 마진에서 태봉으로 바꾼다. 하지만 궁예는 호족들의 반발을 극복하지 못했다. '한권으로 읽는 고려왕조실록'의 저자 박영규씨는 "호족들은 조직적으로 궁예에게 대응했고 이에 궁예는 전횡과 독단으로 맞섰다"고 해설하고 있다. 그런 와중에 왕건과 불화가 생겼으며 결국 918년 6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고려사'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궁예가 왕건을 태조로 옹위했다는 사실을 전해듣고) '왕공이 벌써 천하를 얻었으니 내일은 끝났다'며 어찌할 바를 몰라하다 변복을 하고 산골로 도망쳐 나갔다. 이틀밤이 지난 후 배가 몹시 고파 보리이삭을 잘라 훔쳐먹다 부양(강원도 평강)의 백성들에게 살해됐다" 또 '삼국사기'에는 도주하다가 부하에게 피살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강원도 철원 지방에 내려오는 전설은 이와 아주 반대되는 궁예의 모습을 담고 있어 주목을 끈다. 육당 최남선이 금강산으로 가는 도중 철원 지방에서 채록한 전설을 기록한 '풍악기유'에 따르면 '궁예는 이상을 실현하지 못한 설움을 견디지 못한 채 천명을 알고 이에 순응해 자결한 의군'으로 전해지고 있다. 최근 '슬픈 궁예'라는 책을 펴내 화제를 모으고 있는 이재범 경기대 교수도 "궁예의 포악함때문에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정사엔 기록되어 있지만 실은 고구려계 호족들의 조직적인 결탁에 의해 왕좌에서 물러나게 된 것으로 반란의 명분을 세우기 위해 궁예의 포악함을 지나치게 부각시켰을 수 있다"라고 분석한다.

'전제적 폭군' '비운의 제왕' 평가 엇갈려

나라를 세우고 미륵이라 스스로 칭하며 전제적 정치를 펼친 궁예, 토착 세력을 규합하며 '새나라'의 건설하는 이상을 꿈꿨던 궁예. 이 두개의 얼굴을 가진 궁예에 관한 사연과 지명이 아직까지도 철원의 산과 들에 흩어져 내려오고 있다. 궁예와 부하들이 왕건에게 쫒겨난 것이 서러워 통곡했다는 '명성산'(일명 울음산), 왕건에게 쫒기던 궁예가 한숨 돌리고 잠깐 쉬어 간 골짜기라는 '한잔모텡이', 궁예의 통한을 간직한 최후 격전지 '보개산성'.

근래 역사 재조명 작업과 함께 경북 문경 태조 왕건 촬영 세트장에는 '검은 안대'가 잘 팔린다는 소문도 들린다. 정말 궁예는 '외눈'으로 반쪽 세상을 살다간 영웅이었을까? 아니면 우리가 그를 '외눈'으로만 바라보고 있는 걸까? 천년의 세월을 두고 가을 바람 소리만이 휘-지나간다.

출처 : 강민철 (월간 우리문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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